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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예쁘게 캘리그래피로 글씨를 적어보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커피컵(정확히 말하면 컵은 아니고 뜨거운 컵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는 종이 껍데기이지만)은 오늘 받은 것이 아니다. 오늘은 내면적 갈등 끝에 결국 패배하고 말아서 커피를 사먹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이 글을 쓴 이후에 또 자신감이 생겨서 문을 박차고 나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커피 한잔을 사먹기까지는 많은 갈등이 쫓아오는데, 일단 그 갈등은 적어도 커피가 몸에 안좋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루의 한잔 정도의 커피는 두뇌 활성화에 도움이 되니까 건강상 이유로 커피 구매에 대해 망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첫번째 갈등인 것인가?
일단 커피를 사 마시러 나가기 위해서는 1층에 있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1층의 문은 자동문과 버튼을 눌러야 열리는 문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현재 코로나19로 인해서 복지관이 문을 닫았으므로 자동문은 작동하지 않고 버튼을 눌러야 열리는 문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 문의 특징은 닫혀있을 때 자동으로 잠기기 때문에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는 안에서 열어줄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면 지문이 등록되어 있다면 밖에서도 열 수 있지만 고작 사회복무요원 따위의 지문은 등록해주지 않는다. 결국 커피를 사서 다시 들어오게 될 때는 안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것이 문제다. 문 열어주려고 그 앞에서 지키고 있는 사회복무요원 형한테 부탁하면 못여는 것은 아니지만 괜시리 미안함이 느껴지고 나의 외출 여부를 그 사람이 일일히 알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좀 걸린다. 운 좋게 지나가던 직원 분이 있어서 열어달라고 부탁하면 쉽지만 그것은 운이 좋을 때의 일이고, 커피를 사마시러 나갈 때에 항상 그런 운이 따른다고는 볼 수 없다.
두번째 갈등은, 결국 이 모든 갈등이 첫번째 갈등으로부터 비롯되긴 하지만, 방금 커피를 마시려고 했지만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갑을 가지러 가려면 또 부탁해서 들어갔다가 나와서 커피를 마신 후에 또다시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생각만해도 불편하고 지치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 갈등은, 지갑을 설사 가져올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월급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커피를 사먹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학생증 카드를 꺼내야 한다는 점이다. 전에는 내 얼굴과 학적사항이 적혀있는 카드로 이곳저곳에서 계산한다는 것에 대해 눈치보는 일이 없었지만, 커피가게 아저씨가 왜 굳이 이런 카드를 가지고 다니냐고 말한 이후로 학생증 카드를 사용하기가 꺼려진다. 하긴 뭐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많은 카드중에 학생증 카드를 써야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그 말 이후에는 학생증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나라사랑카드만을 사용해 왔는데, 오늘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월급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나라사랑카드를 사용하려면 그 카드에 돈을 옮겨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토스의 무료 송금 기회가 1회 사라지는 것은 덤이다.
네번째 갈등은,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나는 직원 할인을 받기 때문에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을 1000원이라는 가격에 사먹을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오늘의 커피를 아낀다면 내일은 더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고, 또 더 맛있는 커피를 사먹지 않는다면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하거나 여행을 위해 저축할 수 있다. 특히 이런 고민은 어제부터 뱅크샐러드를 통해 예산계획을 세우고 나서 시작되었는데, 아무래도 예산이 있으면 오늘의 소비가 전체 예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갈등을 적어보고 나니 엄청 사소해 보이는 고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성격상 이건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냥 이런거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나가서 학생증 카드로 결제하면 될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갈등지점들로부터 오는 귀찮음과 피로함, 그리고 이것을 커피를 마셨을 때 오는 나의 효용을 비교해 봤을 때 귀찮음과 피로함이 훨씬 크다. 따라서 나는 오늘의 커피를 마시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내 일상을 얽매는 족쇄가 많다. 애초에 이것은 모두 커피를 마시겠다는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런 욕망 자체가 없었다면 어떠한 고민도 하지 않았을텐데. 무소유와 욕망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철학이 생각나는 오후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욕망이 없으면 살아가는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싶기는 하다. 욕망과 소유욕이 없는 인간이 결국 최종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은 죽음이 아닌가 싶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욕망을 버리면서 사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자연에 죄값을 치르는 것일까?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연은 온전하게 굴러갈테니 말이다.
겨우 커피 한잔 안마셨을 뿐인데 별 생각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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