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책을 읽어야 독서 실력이 는다는 어느 서적 (“독서의 기술”)의 조언을 듣고, 처음으로 집어든 고전이 바로 존 밀턴의 <실낙원>입니다. 많은 고전 리스트 중에서 굳이 이 책을 먼저 고른 까닭은… 사실 없습니다. 그냥 가장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어려울 때는 영문 제목을 보면 확 와닿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낙원의 영문 명은 Lost Paradise. 조금 길더라도 잃어버린 낙원으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고전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실낙원이라는 이름이 괜찮아 보이긴 합니다.
실낙원의 주요 줄거리는 밀턴이 제1편의 첫머리에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태초에 하느님을 거역하고
금단의 나무 열매 맛보아 그 치명적인 맛 때문에
죽음과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와
에덴을 잃었더니, 한층 위대하신 한 분이
우리를 구원하여 낙원을 회복하게 되었나니
…
성경을 읽으신 분들은 익숙하겠습니다. 사탄이 하느님께 대항해 지옥에 떨어지는 것부터, 그러한 사탄이 복수를 위해 뱀으로 변신하여 이브를 꼬셔 선악과를 먹게 하고, 결국 이브를 사랑하는 아담까지도 그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하느님이 지키라고 하신 단 하나의 명령을 어겼으니 벌이 내려졌지만, 자유의지가 아닌 사탄의 꾐에 넘어갔다는 점에서 하느님은 이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기로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은 좌절하지만 천사와의 대담을 통해 인류가 다시 하느님에 의해 구원될 수 있음을 보게 되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복종을 맹세합니다. 이상 다소 거친 요약이었습니다.
이처럼 밀턴은 성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재해석을 입혀 서사시로 풀어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서 내용의 전모를 처음으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밀턴이 이렇게 장대한 서사시를 적은 까닭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리고 ‘복종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으니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사시였기 때문에 호흡이 긴 문장들이 많고 장대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많은 묘사와 비유들이 사용되어 쉽게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책은 모르겠지만) 범우사에서 나온 이 책은 매 편마다 앞에 줄거리를 잘 요약해주고 있어 읽는 와중에 흐름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 문장 아래 있는 많은 각주들이 필요할 때마다 틈틈이 구절 해석에 대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왜 실낙원과 같은 책을 읽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고전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가장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고민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실낙원은 자유의지로 원죄를 선택했고, 그러한 원죄를 씻어내고 다시 구원받기 위해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는 존재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관에 따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화, 삶의 양식, 삶에 대한 태도, 죽음과 삶에 대한 인식 등이 달라지는 만큼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실낙원의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실낙원은 성서의 내용을 밀턴이 재해석하여 서사시로 쓴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가 씌였을 당시 바뀐 세계관과 밀턴의 여성관(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영국 국교회와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밀턴은 청교도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성서는 그 자체로 살아있다기보다는 시대가 지나면서 성서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그 생명력을 유지해가고 확장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성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해석들이 성서라는 네러티브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단일한 해석의 강요는 오히려 성서의 내용을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서는 오랜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특히 서구 지역) 강력한 네러티브로서 인식과 행위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공유하는 네러티브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월드컵이 한창인 지금 2002년 4강 신화라는 강력한 네러티브가 우리나라 국민들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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