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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적어보는 이야기들/책 후기

#책후기_태백산맥(조정래) 7권 중 일부

by Major Tom 2020. 4. 23.

 「태백산맥이란 책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10권) 전체를 리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사실 매번 책을 볼 때마다 놀란다. 도저히 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글솜씨다. 극우파부터 극좌파, 노비에서부터 국회의원까지 수직적 수평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태백산맥」에 등장한다. 그냥 등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래 작가는 각각의 캐릭터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그 캐릭터의 행동과 사상을 매우 깊은 수준까지 묘사한다. 정말 문장 하나하나가 말그대로 주옥같고 대화와 행동에서 드러나는 사상적인 깊이가 끝을 마치 알 수 없는 우물같다. 등장인물들이 실존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오늘 언급하고 싶은 부분도 그 주옥같은 대사 중 하나이다. 7권은 6.25전쟁이 한창 발발하고 있을때의 이야기다. 그 중 이학송이라는 '인민일보' 기자가 북한군이 후퇴함에 따라 같이 후퇴하면서 같은 동무인 김미선에게 말을 거는 부분의 그의 대사를 옮겨봤다. 이학송은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자였지만 좌익 사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있었던 사람으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좌익 측의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기자가 된다. 

 

"한이란 무엇입니까? 아까 김 동무가 말한 대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인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핍박받고 착취당하고 살아온 계급들의 체험이 응축된 수난사인 동시에 정신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지배받은 계급들끼리 통하는 사상입니다.
다만 그것이 정치 이데올로기와 다른 점은 분석적 이론화와 실천적 논리화가 안 되었다는 점입니다.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혁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인민을 주체로 삼고,
특히 기본계급을 중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그 체험적 사상의 덩어리에 분석적 이론화를 가하고, 실천적 논리화를 가하면 그들이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열렬한
혁명세력이 되기 때문
이 아닌가요?
그것이 바로 응축된 한의 폭발력입니다. 그러니까 한은 역사전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  「태백산맥」 7권, 253p.

 

어떤 치열한 사상적인 토론 대결의 장면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저 꽃을 바라보면서 같이 있던 여자 동무와 간단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나온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확실히 TMI(too much information)이다. 꽃얘기 하는데 혁명의 원동력까지 언급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문장들을 스스럼없이 적을 수 있는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과 지식, 그리고 사상 이해에 대한 깊이가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보라색에서는 한이 느껴진다고 인민군 동지인 김미선은 말한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에서 발췌한 이 부분은 공산주의 사상과 사실상 모순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가장 기초가 되는 사상은 모두가 알다시피 칼 맑스의 이론에서부터 출발한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은 유물론이다. 억압과 착취의 경제구조가 사회의 기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자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학송이라는 등장인물이 칼 맑스의 유물론에 얼마나 동조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히 맑스의 관점에서 볼 때 한이라는 정신의 응결은 과학적인 방법(분석적 이론화와 실천적 논리화)를 통해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억압과 착취의 경제관계에서 오는 모순을 인식하고 이것이 한이라는 정서적 감정으로 나타나야 한다. 

칼 맑스가 맞는지 이학송이라는 캐릭터의 주장이 맞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학송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더 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은 역사전환의 원동력'이라는 부분이 크게 와닿는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문제를 인식해서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때, 표출되지 못한 분노가 발효되어 결국 한이라는 응축체로 쌓이고 그것이 터졌을 때 행동하고 바꾼다. '한'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다. 발효된 분노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분노가 쌓이면 화가 나고 흥분하게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은 쌓이면 더 차분해지고 깊이 서글퍼질 뿐이다.

우리나라 민족을 흔히 한의 민족이라고 하는데 한이 그렇게 많은 민족치고 역사전환의 원동력의 중심이 되지 못했던 것은 의문이다. 그래도 근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자 우리나라에서도 한의 원동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학운동이나 독립운동,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으로서 '한'은 분명히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만큼 선명하다 . 그 이전에는 사회적 모순이 요즘과 같이 강렬하지 않았거나 한이 쌓이기 전에 표출하는 어떤 전통적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관점에서 전통문화를 한의 표출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