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오늘은 메이데이, 노동자의 날이다. 광화문에서 하는 메이데이 집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대학교 학생회 활동, 그리고 문선패 활동을 하면서 매년 들렀던 곳인데 이번에는 안갔다. 나 자신이 그렇게 노동자에 깊게 동화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가장 컸던것같다. 당사자성이 없는 데다가 지금은 학생회 활동과도 거리가 멀어졌으니 노동자가 더욱 더 멀게 느껴지게 되더라.
전태일평전은 노동자로부터 점차 멀어지던 나를 다시 돌려세웠다. 조영래 변호사라는 익숙한 인권변호사의 이름에 끌리고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끌려서 이 책을 골라잡았다. 누군가의 평전을 읽어본 것은 노무현 대통령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책과 관련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에서의 전태일의 삶은 조영래 변호사의 평가가 더해져 더욱 선명하고 가슴깊이 다가온다.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는 서문에서 전태일을 이렇게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 선언’이라고 부른다.
전태일평전, 19p.
22년의 짧은 생애지만 나의 22년 생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굵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 지금은 2020년, 전태일이 살던 시기와는 반세기정도 차이나는데, 그의 어린시절을 읽어보면 더이상 처절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전태일은 살았다. 놀라웠던 부분은 그런 삶으로 인해 교육을 받을 기회를 거의 누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에서 언급되는 그의 글들을 보면 사회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고, 표현력이 솔직하면서도 어느 문학가 못지 않게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그의 몇몇 글들을 한번 보자
“불우했던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아니냐”
전태일평전, 33p
1969년 12월 31일 그가 일기에 적었던 글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의 과거는 딛고 일어나기가 굉장히 힘들만큼 어렵다. 그럼에도 그 과거를 원망하고 잊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우한 과거를 딛고 일어서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버림받았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사생아라는 단어와 연결시킨 표현력도 엿보인다.
“오늘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그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나는 그 덩어리가 자진해서 풀어지도록 그들의 호흡기관 입구에서 향을 피울 걸세. 한번 냄새를 맡고부터는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말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어떤가?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는 멋있겠지?”
전태일평전, 189p, 전태일 사상 파트 중 전태일이 청옥시절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이 부분이 전태일 사상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전태일은 이론을 연구하고 사상을 구축하는 대단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그가 마주하고 있는 가혹한 현실속에서 버티고 저항해가며 삶과 의지가 녹아들어있는 그만의 사상을 남겼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그의 사상을 가장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된다.
부스러기라는 말은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 그에게 거대한 사회와 기업주들, 무심했던 시청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 등은 그저 모든 것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려는 억압적인 존재였다. 그 하나의 덩어리 속에서 노동자들의 인간성은 말살되고 그저 덩어리 속의 일부로서 영원히 고통받는다. 그 덩어리 속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스러기가 되어 차차 스러져간다. 전태일의 목표는 확고했다. 그 강한 덩어리가 스스로 부셔질 수 있도록, 모두 부스러기가 될 수 있도록 불꽃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덩어리의 부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완전히 기능할 수 있게 되어 ‘아름다운 색깔이 향’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었다.
전태일평전의 저자인 조영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기존 현실에 대한 이러한 철저한 비판으로 인하여 전태일 사상은 완전한 거부- 완전한 부정의 사상으로 된다. 우리는 그가 현실의 ‘덩어리’ 속에 뭉쳐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는 대에 주목하여야 한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참된 희망과 관심의 가치를 존중하지 아니하고, 그를 단순히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하기 위하여 야합하고 있는 기존 사회의 덩어리, 그것은 완전히 무가치한, 완전히 부정되어야 할, 완전히 추악한 덩어리였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은 그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버리는 일 뿐이었다.”
전태일평전- 197p.
전태일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는 또하나의 도드라진 포인트 하나는 덩어리가 ‘자진해서 풀어지도록’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음에도,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히 실망감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임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 신뢰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 편지를 쓰던 당시 이미 전태일씨는 자신의 희생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의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태일평전- 233p.
이 부분 역시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에 대한 의견 중 하나이다. 그의 삶은 비인간의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동안은 마치 기계처럼 지냈고 퇴근할때 즈음 되서야 겨우 자아를 다시 의식하게 된다고 적기도 했다. 자아가 없는 삶, 그저 거대한 사회라는 기계의 부품으로서 사는 삶은 인간이 아닌 삶, 비인간의 삶이다. 비인간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인간으로서 살 수도 없다. 전태일의 죽음은 비인간의 삶을 끝내는 것이었고 역설적이게도 마지막에 와서야 그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버림으로서 비인간의 삶을 끝내야겠다는 의지를 결연하게 보여주었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비인간으로서의 삶을 끝내는 것과 더불어 “얼음처럼 굳고굳은 착취와 억압과 무관심의 질서”를 깨기 위한 “죽어가는 노동자의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불꽃(p.276)”이었던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로써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던 그 순간으로부터 벌써 50년이 지났다. 현재 우리 사회의 덩어리는 얼마나 분해되었을까?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아름다운 향’은 과연 있기나 할까?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발달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 사회적소수자들이 제대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덩어리를 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가장 인간다운 삶이란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덩어리가 부셔지고 부스러기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전태일의 그 불꽃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며 우리가 그 불꽃을 함께 가슴에 품을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따뜻한 인간의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소중한 인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느끼게 될수록 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더더욱 아까워진다. 희생을 느끼게 될 수록 그 희생을 헛되히 하지 않기 위해 사회에 기여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더 강해진다.
오늘은 전태일 열사 사망 후 50주년이 지난 근로자의 날이다.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도록 이렇게 글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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