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벼운 마음으로 적어보는 이야기들

폭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닌듯하다.

by Major Tom 2020. 10. 16.

대학교 1,2학년 시절, 우리 학교에는 대자보가 유난히 많이 붙었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가는 사람이 없으니 대자보도 잘 붙지 않는 듯하다. 대자보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각종 동아리, 대회활동 홍보물은 대자보라고 부르지 않고, 보통 사회에 외치는 대자보, 학생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대자보, 학생간 성폭력 문제에 관한 대자보, 학교의 잘못된 학사 운영에 항의하는 대자보 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중 특히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던 대자보의 종류가 성폭력, 성희롱 문제에 관한 고발이다. 톡방 내에서 특정 상대방에 대한 성희롱이 발생한 케이스, 데이트 폭력 케이스, 교수의 학생에 대한 성희롱 케이스 등이 그 구체적인 양태이다. 왜 이런 부분에 특히 사람들의 관심이 모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끄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아니면 일상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더 공감이 잘 되어서 그런 것일까? 관심이 많이 모인만큼 잠재적인 2차 가해의 가능성도 커지곤 했다.

그 중 데이트 폭력에 관한 글들이 요즘 생각난다. 사실 대자보에 쓰일만한 데이트 폭력 사건들은 상당히 심각한 경우가 많다. 당사자의 합의로 해결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학생회의 도움이라든지)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피해자가 자신의 신상정보 노출을 감수하고 학교 전체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건들은 보통 연인간 동의없는 성관계나 정도가 심한 가스라이팅과 같은 수준의 심각한 폭력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종류 외에도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은 정말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사자간의 대등한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형적, 무형적인 힘을 가해 언동을 강요하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은 특별한 개념이 아니라 연인 관계라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종류의 폭력이다. 그런데 연인 관계라는 이 특수한 속성 때문에 데이트 폭력은 그 실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랑을 위한 희생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의 의사에 종속시키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잠시 내가 원하는 것을 접어두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할 때도 있고, 연인이 나를 떠나버릴까 두려워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에 복종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행위들이 폭력에 해당하는 지 판단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그래서 사건을 지켜보는 제3자 입장에서는 “이 정도는 괜찮은거 아냐?”라며 고의든 선의든 2차 가해를 저지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나도 내가 한 행동이 혹시 데이트 폭력일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경험이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그 경험의 골자는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행동패턴이었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상대방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그 행동패턴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모호하게 설명하려니까 참 어렵다). 아무튼 연인 관계이고 오래된 연인일수록 서로의 의사를 굳이 다시 확인하지 않고 그 동안의 관행에 비추어 상대방의 의사를 암묵적으로 가정하려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그 암묵적 가정이 실제 상대방의 의사와 일치한다면 굳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특정 순간 상대방의 의사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을 내가 기존의 암묵적 가정에 따라 강요하게 된다면, 그리고 상대방이 ‘연인이기 때문에’ 그 암묵적 가정을 깨뜨리려는 노력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이 바로 데이트폭력으로 변질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서로가 동의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은 상황적 요인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으므로 계속해서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인 관계에서 상대방의 의사에 대한 거부는 연인관계의 성질상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므로 상대방이 명시적인 거부를 하지 않았다해서 그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도 안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명시적인 동의를 얻는 것이고, 상대방의 표정, 행동, 말투 등을 통해 상대방의 의사를 계속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폭력은 가해자가 폭력이라고 느껴서 폭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폭력이라고 느낄때 폭력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