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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적어보는 이야기들/책 후기

#짧지않은 책후기_ 리영희『우상과 이성』

by Major Tom 2020. 11. 15.

리영희 독서논술 대회가 있었지만 아쉽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그 때의 내가 적은 독후감은 남겨두고 싶어서 블로그에 올려본다.

'리영희- 대화'를 저번 글에서 다루었고 이번에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함께 그의 최고의 저서로 손꼽히는 『우상과 이성』을 읽게 되었다.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준다. 


 

여전히 우상은 깨어지지 않았다.

광복 후 70여년이 지나며 믿을 수 없는 발전을 이루었던 대한민국. 식민지 시대의 착취와 전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다시 모든 것을 쌓아올렸고,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과 노력 끝에 민주화를 쟁취해냈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제도적 발전에 비해 사람들의 의식이나 정신의 변화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냉전 시대의 선과 악이 존재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그 자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선으로 찬양받고 있고, 북한과 사회주의는 악으로서 그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냉정하게 외면 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여전한 우상

일반적으로 동서독의 통일과 소련의 붕괴는 냉전 종료의 기준점이 된다. 하지만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에서 분단된 채 남아있는 한반도에서 냉전으로 인한 흉터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광복 이후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행정 및 치안을 담당할 인력을 구하기 위해 과거 일제 식민지 지배에 종사했던 자들을 대거 이용하였고, 이 세력들은 이후 터진 한국전쟁 과정에서 반공이라는 기치를 높이 내 걸고 자신들 지위와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했다. 이후에도 반공주의는 어떤 정책에 실체적인 위험이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것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사회적 반대세력, 노동조합과 노동자, 진보 세력을 꺾어놓기 위해 계속해서 이용되었다. 최근 전 국민에게 코로나19 관련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논의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그러한 일종의 ‘기본소득’ 정책들이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등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프레임은 존재한다.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를 기초로 한 이러한 사상의 선악 이분법은 사회주의를 ‘악’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선’과 연결시킨다.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거치는 역사 속에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모순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응한 반(反)논리로서의 사회주의를 합리적 이유 없이 탄압하는 것은 더 나은 체제로서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자본주의가 가지는 자체적인 모순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당장 이번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마스크 등의 구호 물품을 구할 수 없어 더 큰 위험에 노출된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통일 관련 정책 추진에도 영향을 미친다.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악’을 담당하고 있는 북한과의 교류나 협력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된다. 북한 정권의 북한 인민에 대한 인권탄압 문제나, 고의든 실수든 북한에 의해 종종 일어나는 공격들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논의는 분명 필요하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한 전체를 하나의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대결 일변의 구도를 만드는 것은 평화통일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위와 같은 선악 이분법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감추고 대안 제시를 거부한다는 점, 그리고 통일 정책 논의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평화통일에 대해 이성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불평등과 인간소외, 전세계적 위기 대응에 취약하다는 자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먼저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1%와 나머지 99%간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현상이 나타난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적 불평등은 곧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선거공영금이 필요하고 선거운동비용 역시 리플렛 하나 만드는 것도 버거운 군소 정당에게는 버겁다. 대표적인 사회적 불평등은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다. 유명 사립대학 구성원들의 절반 이상은 높은 소득분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기회의 불평등은 또 다른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소득 수준별로 향유하는 문화의 수준 역시 상당한 격차가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활동이 자본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으로 끝난다. 끊임없는 자본 확대 과정 속에서 인간은 수단과 부품으로 전락하며 소외된다. 2016년에는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업체에서 일하던 김 군이 혼자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2018년에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계약직이었던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인 채로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산재사고가 매년 발생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 수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19 감염자와 사망자가 자본주의의 수호국이라 불리던 미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전 인류 공동의 문제인 기후변화, 전염병 등 대형 재난에 상당히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저하게 민영화된 의료기관과 자본 수준에 따라 차별화된 의료혜택, 백신 및 코로나 예방 자원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은 코로나 확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코로나19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경제적 빈곤층, 사회적·인종적 소수자라는 점,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이 특히 경기침체로 인해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점은 취약 계층을 재난 앞에서 방치해버리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선악 이분법이라는 잘못된 우상에서 비롯된 북한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이 사회와 국민을 위한 최선의 정책이 논의되고 결정되는 것을 방해한다. 북한 정권이 얼마나 악한가라는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가 분단 그 자체로 인해 입는 손해는 막대하다. 분단으로 인한 경제적 손해로, 전쟁으로 인해 입었던 직접적인 피해 외에도 남북 군사대치 상황으로 인해 실제보다 한국의 주가 가치를 낮게 책정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필요 이상의 과도한 국방비, 분단으로 인해 반도로서의 지리적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는 점 등이 있다.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도 한국은 주권국가로서 그 주체적인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백악관과의 조율 없이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통일 관련 정책의 범위는 상당히 제한적이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균형외교가 중요해지는 시점에서도 분단 상황은 그러한 방식의 외교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에 대한 전시작전권이 미국에게 있다는 것도 국가 주권 차원에서는 심각한 주권 침해이다. 

“국민의 폭넓은 사상과 시민의 비판력을 마비시키는” 획일주의는 “민주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할 사상(리영희, 우상과 이성)”이지만 분단 상황의 특수성을 이유로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이 논의조차 되고 있지 못하면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또, 독립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식민지배의 “부정을 부정(리영희, 우상과 이성)”하고 하나로 뭉치기도 전에, 광복 후 민족이 분단되어 “내적 근거(리영희, 우상과 이성)”를 상실한 채 민족적 자존감 회복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했고, 기회주의가 사회의 주류가 되어버렸으며, 통일 문제에 대한 감정소모적인 남남갈등으로 인해 국민간의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사회적 신뢰가 충분히 쌓이지 못했다는 점은 사회적 손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과 이성』이 여전히 의미있는 이유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며, 단순한 선악 이분법을 극복하고 분단과 통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올바른 길을 찾는 종국적인 이유는 결국 한 사람, 한 사회, 한 국가를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목적 때문이다. 『우상과 이성』에서 리영희 선생은 분단되고 외세에 종속된 국가로서 살아가는 한국에 대한 대안적 양식으로서 베트남을 연구했고, 인간사회 대부분의 물적 양식으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와의 대척점에서 새로운 체제로의 변증법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중국을 연구하였다.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역사 속에서 중국과 베트남을, 한국 사회라는 ‘정(正)’에 대한 ‘반(反)’으로서 파악한 것이다. “한국인들의 눈에서 두터운 장막을 걷어내고 객관적인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사명(리영희, 대화)”이라고 생각한 그에게는 진실 탐구를 위한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우상과 이성』은 1970년대에 작성한 책이고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기초로 하여 서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상과 이성’이 주목받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그 우상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깨어지지 않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 사회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라는 명확한 목적의식 하에서 단순히 현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40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그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그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봤던 중국은 데탕트 이후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수용한 이후 빠르게 발전한 중국은 경제적 불평등 역시 극심해졌으며 그로 인해 공동체적 의식 또한 과거에 비해 약화되었다. 최근 헌법 개정을 통해 사실상 주석의 영구집권이 가능해졌고, 홍콩 민주주의 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제정을 통해 탄압 하고 있으며, 자치구와 소수 민족에 대해서도 강하게 대응하고 있어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들은 바뀌었고 대안 역시 달라질 가능성이 있지만, 인간에 대한 존중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명확한 목적의식 하에서 우상들을 깨뜨리고 객관적인 인식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이 중요하다. 이러한 목적의식 하에서는 사회주의적 정책도, 북한과의 협력·교류도 ‘악’으로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철저한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수많은 정보들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오늘날, 여전히 깨지지 않은 우상에 맞서 계속해서 진실을 추구하라는 『우상과 이성』의 메시지가 주는 울림은 더욱 더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