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을 읽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할일이 많아지면서 책읽을 짬이 잘 나지 않는다. 보통 빌려온 책은 다 읽어서 반납하곤 했는데 이번엔 절반정도는 읽지도 못하고 반납을 해야할 것 같다. 하루에 자기전에 한시간 정도는 책 읽는 데에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의 책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이다. 이 책은 거의 하루만에 읽었는데, 책의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우연히 면접알바 하면서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8시간 정도 내리 책만 읽었던 것 같다.
1. 이 책을 선택한 이유?
LEET(법학적성시험) 관련 과학도서를 찾던 중 유튜브 알고리즘에 재밌는 영상이 하나 뜨더라. 사실 유튜브에서 과학을 설명해준다고 하는 영상들은 잘 믿지 못해서 안보곤 하는데 이 영상은 어떤 것을 알려준다! 이런 느낌이라기보다는 과학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영상이라서 한번 들어가봤다. 거기서 소개했던 책이 바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였다.
사실 책 제목부터 매력적이기도 했다. 대체 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거야?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시간이 멈춰있기라도 하다는 것인지.. 안그래도 요즘 테넷이나 인터스텔라 같은 시간 관련 물리학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항상 한번에 이해가 안돼서 나무위키를 읽어가며 영화 내용을 되짚곤 했다. 그런 영화 이해에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겨보게 되었다.
2. 이 책은 어떤 책이야?
책이 얇은 편이고 글씨가 큼직하다. 물리학 서적답게 문체가 깔끔하고 필요한 것 이외의 설명을 하지 않는다(물리학 서적의 특징인가?..). 이 책은 총 3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파트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시간의 특징이라고 믿고 있었던 시간의 유일성(시간은 하나밖에 없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으로 흐른다(방향성), 현재의 존재(지금 이 순간은 전 우주의 공통적인 지금이다), 독립성(시간은 독립적이다) 등이 '틀렸다는 것'을 지금까지 발전한 물리학 지식을 통해 밝혀낸다. 즉 시간이라는 것이 유일하지 않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다른 리듬으로 흐르고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없으며 시간의 간격을 결정하는 토대는 다른 실체들과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장의 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세가지 특징인 입자성(양자성), 불확정성, 미결정성(하나의 양자가 다른 양자와 상호작용할 때만 구체적인 위치를 얻어 발현된다)을 시간 역시 가지고 있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굵직굵직한 물리학 이론(엔트로피, 열역학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과 간단한 수학(부분순서) 등의 개념을 친절히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두번째 파트에서는 시간이 없는 세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세상은 양자 사건들의 방대하고 무질서한 그물이다. 깔끔한 싱가포르보다는 어지럽고 지저분한 나폴리와 비슷하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22p 中
두번째 파트에서 가장 핵심으로 다루는 것이 세상이 사물이 아니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비롯한 사물들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기본적으로 양자이다. 양자는 양자들의 관계에서 상호작용하면서 확률적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동안 물리학자들은 근본 '실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 훨씬 잘 이해된다. '사물' 자체는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며 시간의 '실체'가 없다는 것도 시간이 멈춰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되지 않으며 거대한 똑딱이로 측정되지 않는다는 뜻(112p)"이다.
"세상에 대한 근본 이론(에)...시간의 변수는 필요하지 않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만 설명해주면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변수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해주면 되는 것이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26p.
저자가 연구하고 주장하는 '양자중력' 이론에 따르면 세상을 설명하는 기본 방정식에서 더 이상 '시간'이란 변수는 필요하지 않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물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세번째 파트에서는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이라고 느끼는 것들은 무엇인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물리학을 통해 시간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시간을 느끼고 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카를로 로벨리는 "이러한 시간 관념이 지각 오류의 산물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의 특수성, 곧 근사성이 만들어낸 결과" (옮긴이의 글 中)로 본다. 시간은 우리의 기억, 예측능력 등 정신의 작용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기억과 예측을 통해 이런식으로 펼쳐진 공간이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원천이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96p.
3.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얻은 게 뭐야?
저자는 챕터 끝자락마다 내용을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고 전 페이지에 있던 내용들을 다시한번 이야기해주면서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비유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인용도 자주 한다. 물리학의 내용 자체가 난해해서 그렇지 설명은 굉장히 친절하다. 읽어봤던 물리학 책들 중에 가장 친절한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내용을 요약하는 것도 쉽지 않을만큼 책의 내용은 짧으나 담고 있는 내용은 방대하다. 그래도 물리학 비전공자가 읽기에 무리가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 있다.
읽으면서 계속해서 들었던 생각은 현대 물리학이 불교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매우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전에 금강경을 다루는 책(#짧은 책후기_도해 금강경)을 읽었을 때에도 부처는 실체란 없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했고 현실에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역설했다. 현대물리학의 이런 발견들을 부처가 오래전부터 이미 통찰하고 있었다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비유와 이야기는 물리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인 것 같다.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세상을 이용해서 이론을 구성한다. 지식과 이론을 구성하는 요소가 경험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리학의 목표는 결국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근원을 찾는 것이다. 양자역학을 비롯한 새로운 이론들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제는 실체라는 것이 없고 관계, 사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지점까지 왔다. 실체는 분해되고 남는 것은 개별 요소들의 상호작용이다. 과연 근원이란 것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관계들이 근원이라면 그것을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물리학에 대해 더욱 궁금증을 만들어내는 이 책, 상당히 인상깊었다.
총점: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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