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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적어보는 이야기들

고소와 재판에 기대는 정치는 적어도 정의로운 정치는 되지 못할 것이다

by Major Tom 2020. 2. 11.

요즘은 국순옥 선생님의 ‘민주주의 헌법론’을 읽고 있다. 원래 빌리려던 책은 ‘자본주의와 헌법’ 이었지만 도서관에 이 책이 없었던 관계로 흥미로워 보이는 이름의 이 책을 들고왔다. 책의 난이도는 상당했다. 국순옥 교수님의 여러 논문과 글들을 엮어놓은 것 같았는데, 정치학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선행적으로 필요로 하는 책이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개념과 이론들이 특별한 기초 설명 없이 다뤄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떻게 겨우 책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는데, 뒤로 올수록 인상깊은 구절들이 많이 남더라. 그 구절들 중에 하나는 ‘헌법재판국가적 경향은 의회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헌법재판국가라는 것은 결국 국가의 주요한 결정들이 헌법재판소나 헌법재판관들에 의해 결정되는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국가형태는 인민 대표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의회의 민주주의적 경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이와 비슷한 취지의 글을 블로그에 한번 적었던 적이 있었다. 타협과 협상, 그리고 진지한 토론 대신 고성과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국회의 실태를 보면서 적었던 글이었다. 개별 국민 혹은 인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 다양한 의견들의 스펙트럼을 존중하거나 협상을 통해 의회 내에서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소, 재판을 통해 사법부에 정치적 결론을 내려달라고 의존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국회나 대통령은 검찰의 권력이 너무도 강력해서 수사권을 분산시키고 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을 통해 그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찰의 권력이 그렇게도 강력해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 동안 국가권력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의회를 통한 타협과 협상이 아니라 사법부와 검찰에 그 짐을 자주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군사정권 뿐만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문제임이 틀림없다.

마치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각 급 재판소들과 헌법재판소의 위상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 헌법의 가치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각종 사회단체들이 법치국가적 틀 내에서 합법적으로 투쟁을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가장 강하게 가지는 의회에서의 해결보다는 민주적 정당성이 거의 없는 헌법재판소에서의 헌법소헌이나 위헌판결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칼로 무를 자르듯이 나와 ‘적’을 구별하게 되는 결단주의적 경향을 강화시킨다. 사법부에서의 판결은 의회에서의 결과물과는 다르게 옳고 그름을 판별한다. 옳고 그름을 나누지 못하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의 경우도 사법부는 그 자체적인 성격에 따라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결론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협상과 토론을 위한 공간은 당연히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인민들의 이해관계와 의견들은 따라서 정치적 결정으로부터 괴리되어 과소대표되고 정치 사법 엘리트들의 이해관계는 과대대표되게 된다.

헌법재판국가에서의 또하나의 문제는, 헌법재판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헌법의 완결성이라는 점이다.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적 협상공간을 줄이고 사법부의 권력을 늘려놓았는데 사법부 권력 정당성의 원천이 되는 헌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헌법재판국가 자체의 정당성도 흔들게 된다. 헌법은 결국 자기완결성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변혁하려는 시도나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대해 폐쇄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고 이는 다양한 의견에 대해 방어적이게 된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그 근본 이념으로 설정해놓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자유와는 멀어지게 된다. 헌법이 완결성이 있다는 것은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것과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헌법재판국가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의회 민주주의가 답답할지도 모른다. 지지부진한 협상과정, 타협은 커녕 의견의 일치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정당들을 보면서 속시원하게 빠르게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고소와 재판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정치는 적어도 정의로운 정치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