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사: ‘나쁜 여자’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는 ‘나쁜 페미니스트’ 되길
- 한겨레 2020.6.6 토요판
- 글쓴이: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 연구소 교수
- 원문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8198.html
글 요약
1. 서론
시대를 막론하고 가부장 체제에 저항하고 사회적 통념에 도전했던 여성들은 항상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불려옴. 아예 본인들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여 부정적 낙인을 긍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하기도 함.
2. 본론
(1) ‘희생양 논리를 넘어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적 낙인과 가부장제로부터 오는 억압, 욕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여성의 삶이 내 탓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하여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가부장제에 도전했다.
가부장제는 ‘희생양의 논리’에 기반하는데, 희생양 논리란 다른 하나가 살기 위해서 다른 하나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가부장 체제에서 남성이 주체가 되고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여성을 열등한 대상으로 삼고 멸시했는데, 이런 여성혐오의 구조는 전형적인 ‘희생양 논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제로섬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희생양 논리’를 이용해 재력과 능력이 있는 여성은 성공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여성’으로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나 자신’이 살아남은 것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가부장체제와 결부되어 대부분의 여성들이 당면하는 경제적 빈곤, 문화적 멸시, 폭력, 정치적 대표의 부재 등을 여성 개인의 무능력으로 치부했다.
따라서 유럽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으로서의 ‘나’ 보다는 ‘우리 여성’을 고려하는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했고 이런 ‘희생양 논리’를 강조하는 세상과 대치했는데, 이런 페미니즘의 성질상 같은 ‘희생양 논리’에 기반하고 있던 인종차별, 성소수자차별 등에 대항하는 운동과 연대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2) ‘나쁜 여자’가 되는 게 페미니즘인가?
‘나쁜 여자’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을 말한다(‘나쁜’ 여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여성으로서 남성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온갖 욕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희생양 논리’에 기반한 가부장 체제를 뒤흔드는, 세상에 저항하는 ‘나쁜 페미니스트’인가?
체제 변혁 없이 남성의 파이를 되찾아 오는데만 불과한 이들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나쁜 페미니스트’의 정치학을 퇴색시킬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남성의 지위는 탈환했으나 체제나 ‘희생양 논리’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체제의 변화대신 개인의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강화한다.
우리나라의 몇몇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이와 비슷하게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서 도덕과 정치적 올바름을 벗어던지며 빼앗긴 파이를 되찾자고 주장한다. 생존이 지상 과제인 이들에게 신자유주의 경쟁의 틀을 바꾼다든지 다른 소수자들의 형편을 고려하는 것은 ‘백인 중산층 여성’의 사치라고일 뿐이며 이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3) 우리의 페미니즘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입장에서 이들이 ‘나쁜’ 페미니스트인지는 불분명하다. 불법촬영과 N번방을 규탄할 때는 ‘우리 여성’을 위해 가부장제를 뒤흔다는 나쁜 페미니스트 같지만 노동자, 이민자,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여타 다른 소수자들의 생존을 대립시킨 채 후자를 적극적으로 배제할 때는 신자유주의의 ‘희생양 논리’를 강화시키는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희생양 논리에 오히려 의존하여 여성의 파이를 되찾겠다는 전략은 능력있는 여성들에게만 유리하고 그들이 성공한 뒤 다른 여성들을 위할 수 있을지는 개인의 윤리에 기반한 것이라 불확실하다. 진정한 ‘나쁜 페미니스트’라면 희생양 논리를 넘어 변혁적 세계에 대한 모색을 해야한다.
논리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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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막론하고 가부장 체제에 도전했던 ‘나쁜 페미니스트’들, 그들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가 가부장제의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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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사회구조는 남성의 성공과 주체적 지위를 위해 여성을 열등한 지위로 격하시켜야만 하는 제로섬의 ‘희생양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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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희생양논리를 기반으로 가부장제 사회구조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와 결부되어 여성들이 당면하는 차별적인 문제를 ‘여성’의 문제가 아닌 한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치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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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남성들의 파이였던 정치적, 경제적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나쁜 여자’)은 희생양논리에 기반한 가부장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없고,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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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생존’을 위해서 도덕과 정치적 올바름을 벗어던지고 남성에게 빼앗긴 파이를 되찾자는 주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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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부장제, 신자유주의 체제의 희생양논리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단순히 여성 자체의 생존만 강조하여 희생양논리에 함께 희생당하고 있는 여타 다른 소수자들의 생존에 대한 고려를 적극적으로 배제해 버리는 것은 기존의 체제와 구조를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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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나쁜 페미니스트’라면 희생양 논리를 뒤엎고 변혁적 세계에 대한 모색을 해야한다.
평가
페미니즘이 정체되어 있는 시기이다. 혐오와 차별의 문제는 여전하지만 인터넷 상에서의 조롱과 멸시, 갈등에 의해 페미니즘의 본질이 흐려지고 왜곡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체되어 있다. 페미니즘이 제시하는 방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점차 많아지고 있음에도(2010년대 초반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은 그에 비하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페미니즘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해주는 글이다. 페미니즘은 ‘희생양 논리’에 기반한 사회의 구조 자체를 변혁시키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존 체제 내에서의 파이를 찾아오려고 자신을 채찍질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채찍을 내려놓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둘러보아야 한다.
이 글은 또한 장애인, 성소수자, 흑인 등의 여타 소수자들이 여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희생양논리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같은 희생양 논리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이런 여타 소수자들과의 연대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한 트렌스젠더가 여대에 입학했다는 사실로 인해 떠들썩해지는 일이 있었다. 그 당시 페미니즘적 성향이 강한 여대에서 오히려 소수자에 대한 입학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논란이 있었는데, 나는 이런 여타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오히려 여성의 인권신장 및 페미니즘이 이루고자 하는 방향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이전 글에서 밝힌 바 있다.
2020년 가장 먼저 우리가 들어야 하는 속보는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N번방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분노했다. 20년대에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이 제로섬의 사회구조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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